에디터님들과 얘기를 나누게 되면서 서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맞게 글을 써 보자는 의견이 나와 시도해 보기로 했다. 질문 중에서 ‘20년 전의 당신에게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떤 조언을 해 주고 싶으신가요?’가 눈에 들어왔다.
22년 8월부터 지독한 우울증과 함께 삶에 대한 회의가 찾아왔다. 너무 많이 지쳤고, 뭔가 의미를 잃기 시작했고, 삶에 대한 재미와 즐거움이 사라져 버렸다. 아무리 해도 빠져나올 수 없는 터널에 빠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 여행은 아니지만, 삶을 돌아보면서 정말 20년 전의 나에게 필요한 게 무엇이었는지 점검할 수 있었고, 누군가는 나와 같은 실수나 아픔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펜을 들었다.
먼저 삶을 즐기면서 살라고 말해주고 싶다. 20대의 나는 뭔가 해야 하는 건 많은데,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어떻게든 뭔가를 하는 것이 잘 사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뭔가 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의 나가 소중하고, 가치 있고 괜찮다는 것을 피부로 절실히 느끼면서 다독이며 (다른 사람은 칭찬하고 세워주면서) 정작 나를 칭찬하며 가지 못했다.
배우고 들은 지식으로만 채우고 삶의 체화가 되지 않은 채 살아서 인생을 즐기지 못한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도, 사람들과 어울리고 놀면서도 뭔가 죄책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자유롭지 못했다. ‘이런 데서 노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이럴 때가 아닌데.’라고 생각하며 그때를 즐기지 못했다. 뭔가 하지 않으면 불안했다.
안정된 경험이 매우 부족했는데, 백수로 보낸 시간도 많다 보니 자유를 누리지 못했다. 내가 아무것도 못 하고 있을 때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때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나와의 긴밀한 대화를 통해서 쉴 때는 잘 쉬고, 아플 때는 그냥 다른 생각은 잊고 아파야 했다. 진정 내 안에서 즐거워하면서 웃고, 만족하며, 감사하는 삶을 천천히 가지며 인생을 누리라고 말하고 싶다.
두 번째로, 극한 상황, 고난 속에서 마음을 지키라고 말해주고 싶다. 너무 큰 이상이나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고 좌절하고 실망하지 말고, 내가 뭔가 혼자서 다 하려는 생각과 행동을 멈춰야 했다. 계속 아프다고,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다고 자책하거나, 자기연민에 빠지는 습관을 버려야 했다. 우울증을 앓다가 회복된 여성의 얘기를 들어보니 너무 높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이 있으면 우울증이 온다고 하더라.
두통과 오한도 있었고, 구토도 있었고, 불면증에, 길거리에서 쓰러지기도 하고, 눈의 시신경 장애로 시력을 잃을 뻔하고, 내 맘대로 안 되는 것이 많았지만 너무 나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계속 오는 고통과 아픔, 부정적인 환경에서,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고, 회피하고 싶었다. 인생에서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를 풀기 위해 아주 천천히 깊게 고민하고, 성찰하고, 마음과 영혼의 근육을 키웠어야 했다. 잘못된 기초를 세우고 집을 지었다.
온종일 아파서 아무것도 못 하는 날이 오면 정말 절망스럽고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도 한 두 번 해 본 게 아니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하는데, 정말 마음을 난 지킨 걸까 뒤돌아보면 그러지 못했다. ‘다시 시작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마음가짐임을 깨닫기까지 2년이란 시간이 걸렸다’라는 어느 작가의 말을 다시 보고 또 보게 된다.
세 번째로, 대인 관계에서 나를 지킬 수 있는 나만의 주장을 하라고 권하고 싶다. 살면서 뭔가 쫓기듯이 살다 보니, 내 삶의 방향이나 목표에 대해서 정말 숙고하는 시간을 잘 가지지 못하고, 삶의 기준이나 철학이 부족한 채로 살았던 것 같다. 또 나의 성격과 가치관의 문제도 있었다. 남을 배려하고 맞추고 참는 성격이다 보니, 남의 조언이나, 간섭이나, 나에게 무례하거나 불편하게 하는 말이나 행동에 대해서 분명한 선을 긋지 못했다. 그런 일들에 대해서 참고 살아서 분노나 억울함이 많이 쌓였다.
내가 힘들다면 부모에게도 힘들다고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을 요청하고, 아프면 아프다고 얘기해야 했다. ‘이건 너무 힘들어요. 받아들이기 어렵군요. 부담스럽네요. 하지 마세요.’ 등의 말을 해야 했다.
중1 때의 일이다. 같은 반의 모르는 아이가 계속해서 장난을 치고 딴지를 거는데, 뭔가 하지 말라고 얘기하거나, 맞서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그냥 난 평화주의자였기에 어떻게 싸우는지를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이의 장난을 참을 수 없어서 약간의 저항을 했는데, 그 아이가 내 눈을 손톱으로 찍는 바람에 실핏줄이 터져버렸다. 그래서 양호실로 갔더니, 내 마음은 치료만 받고 가고 싶었는데, 양호 선생님은 담임 선생님께 알려야 한다고 하셨다. 곧바로 나의 상태를 담임에게 알렸고, 결국 둘 다 담임 선생님께 매를 맞아야 했다. 하지만, 그 아이는 그 뒤로 장난치거나 나를 괴롭히지 않아서 좋았다.
30대가 되어, 심리 상담을 받게 되었는데, 왜 그때 부모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말문이 탁 막혔다.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나이 때에는 부모에게 뭘 요청하거나 도움을 구하는 것이 당연한 건데, 그러지 못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내 기억을 더듬어 보면 부모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 것과 어쩌면 부모가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존재라는 의식이 없어서였던 것 같다.
나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맞춰주다 보면 내 할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에너지를 빼앗기게 된다. 사람들은 책임질 수 있는 말을 다 하는 게 아니었다. 그들은 이렇다 저렇다, 이걸 해라 저걸 해라 조언도 하고 간섭도 하지만, 결국 그 말을 받아들이고, 선택하고, 책임지는 것은 오로지 나의 몫이다. 아무리 전문가의 말이라도 내가 직접 검증하고, 시도하고 실험해보면서, 내 선택에 후회가 없도록 해야 했다. 내가 힘들다면, 아프다면, 부담스럽다면, 그들이 이해할 수 있게 아주 구체적으로 얘기해야 했다. 정말 나의 가치관과 철학에 맞는 거라면 때로 강하게 주장하고, 아닌 건 아니라고 얘기해야 한다. (물론 직장에서는 다 이렇게 할 수 없다. 그런데 요즘 20대들은 자기 주장을 잘 한다.^^) 어디가 어떻게 힘든 건지, 따라가기가 어디가 어려운 건지 얘기해야 한다.
물론 그것도 나의 얘기를 상대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와 아닐 때가 있다. 부모에게 요청할 때 내가 정말 몸이 아픈데 낫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내가 아프다고 얘기를 해야 했고, 괴롭다고 말해야 했다. 그래야 아. 얘가 정말 아프구나. 이 병원이 아니면 다른 병원, 다른 치료를 해 볼 것이다. 그냥 나의 착한 성품으로 괜찮다고 여기며 따라갈 때 너무 힘들었음을 이제야 고백한다.
네 번째로, 스트레스를 푸는 나만의 방법을 찾으라고 말해주고 싶다. 독서도 영화도, 뮤지컬도, 만남도, 새로운 장소나 맛집에 가는 건 다 좋았다. 하지만 결국 나의 억압된 분노와 불안, 우울은 계속 이어졌다. 쉴 때는 쉬고, 아플 때는 아무 생각 말고 아파야 했다.
외향적이었던 나는, 많은 활동을 통해서 뭔가 힘을 얻고는 했다. 하지만 오롯이 나만의 시간, 혼자 마주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걸 몰랐다, 내가 현재 어떤 상태에 있는지, 왜 내 감정은 이런지, 왜 스트레스가 쌓이는 건지 점검하는 시간을 많이 놓쳐 버렸다. 그래서 지금의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 나를 점검하면서 왜 책을 읽어도 변화가 되지 않는지, 적용이 안 되는지를 보게 되는 것 같다. 아직 스트레스를 푸는 완전한 방법은 찾지 못했다. 누가 안다면 말해주길^^:
다섯 번째로, 일정한 루틴을 가지고 기초 체력과 근력을 키우는 건강한 생활을 하라고 말하고 싶다. 사람의 몸은 낮에 주로 활동하고, 밤에는 쉬도록 만들어져 있는데, 내가 해야 할 일을 마치다 보면 늘 새벽 시간을 넘기곤 했다. 그 습관은 졸업 이후에도 회사 생활할 때도, 아프고 나서도 바뀌지 않았던 것 같다. 졸업 후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백수 생활을 할 때에도 정해진 루틴이 없었다. 그건 목표가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자기 관리를 잘하지 못했다.
좋은 책은 읽었지만, 삶에서 규칙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토한다고, 빵 같은 밀가루 음식이 들어간다고 막 먹었다. 왜 내가 뭘 먹으려 하는지, 밤에도 먹으려 하는지 이유를 알고 허전하고 힘든 마음을 잘 달랬어야 했다. 적어도 일어나서 바로 운동을 하든, 물을 마시든, 책을 읽거나 명상을 하든 내 몸과 마음을 챙기는 루틴이 필요하다.
10대와 20대는 기초 체력과 근력을 키우는 중요한 시기다. 일하거나 만남을 가지려면 체력이 필요하다. 몸이 예전과 같지 않음을 느낀다. 과거 그렇게 뛰어다니고 놀아도 지치지 않는 나이가 아니다. 살이 찌지 않아서 근력을 못 키운 것도 있는데, 계속되는 소화불량, 역류성 식도염 등도 원인이었을 것이다. 살이 안 찌더라도 나만의 운동을 찾고 계속해야만 했다. 운동을 제대로 하는 방법을 알고 하였다면 무릎힘줄이 상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손가락과 팔꿈치, 손목 등이 상하는 일도 줄어들지 않았을까 싶다. 이 부분이 갖춰진다면 일하거나 아이들과 놀 때도 도움이 될 것이다. 어느 날 공원에서 축구하는 아빠와 남자 아이 둘을 보는데 그렇게 축구 할 수 없음이 너무 마음 아프더라.
여섯 번째로, 너무 일찍 한계를 긋지 말고 변화와 성장이 있음을 믿고 더 시도하라고 말하고 싶다. 실패는 삶의 한 과정이자 일부분이다. 20, 30대는 한계를 그을 나이는 아니다. 그런데 30대에 내 몸이 맘대로 움직여지지 않고 호흡곤란과 마비, 구토 등의 증상이 생기면서, 제대로 일을 못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내가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의 양과 질을 생각해야 했고, 무리를 하게 되면 무슨 증상이 나오는지를 알아야 했다.
내가 알아낸 한계는, 오후에 일할 수 있고, 5시간 이상 일하면 무리가 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14년도에는 어떻게든 아파도 참고 8시간 이상 일을 하기도 했었지만 갈수록 힘들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내 몸과 정신에 한계를 그었던 것 같다. 내가 가진 꿈과 목표를 잃어버려서 더욱 실망했고, 포기했던 것 같다.
사람마다 저마다 가진 역량과 능력이 다르고, 몸의 한계도 다를 것이다. 갑자기 몸이 아프거나, 병에 걸렸거나.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지게 된다면 한계를 느낄 수도 있고, 에너지도 많이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찍 한계를 그어버리게 되면, 운동할 때 힘들다고 포기하면 근육이 안 생기듯이, 성장과 발전이 없다.
그러기 위해선 꾸준히 뭔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끈기를 가지고 일을 마무리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뭔가 딱 1가지라도 똑 부러지게 잘하는 습관이나 일이 있었다면, 전문성을 가지고 살았을 것이다. 한계가 왔다면 내가 새로 도전해야 할 영역이 있다는 것으로 보고 웃음짓는 마음의 여유도 키우라고 조언해 주고 싶다.
마지막으로 플랜 B를 세우며 살라고 말해주고 싶다. 어느 하버드 졸업반 학생은 진로를 결정할 때 1가지만 정해 두지 않고, Plan B와 C도 세운다고 한다. 이렇게 세계 최고의 뛰어난 학부생도, 인생을 살아갈 때, 계획대로 되지 않음을 알고 플랜 B를 세운다는 사실을 알고 뒤늦게 후회했다.
다양한 대외 활동과 더불어 작지만 벤처 기업인 교육 회사에 입사했으나, 회사를 나왔을 때의 다른 계획이 없었다. 포럼 관련 일이나 청소년 캠프 일도 했지만, 몸이 말을 안 듣게 되면서 인생을 어떻게 설계할지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을 맞닥뜨릴 때, 최악의 상황일 때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고민을 깊게 못 했던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이건 유연성을 키우라는 말이다. 우리가 살면서 나의 뜻과 상관없는 일이 많이 발생하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이나 진로에 대해서 여러 가지 가능성을 검토해 본 후 도전하고 실행하고, 실패하길 바란다.
위의 조언들은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자, 후회하며 사는 2~30대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쓰게 되었다. 그러나 글을 마치면서, 이런 의문이 든다. 과연 20대의 나에게 현재의 내가 곁에서 말해준다 해도 과연 제대로 된 마음가짐을 가지고 지금 상황을 뛰어넘을 만큼 강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 힘든 그 시절에도 어떻게든 해 보려고 발버둥 쳤는데 말이다. 내가 계속 건강했다면 어땠을까? 지금의 이런 조언을 해 주었을까? 아직은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 하지 못했던 것들을 지금이라도 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가장 사소한 일을 찾고, 실천해 보는 것이다. 또다시 후회하지 않는 삶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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