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업팀장이다. 매일 두세시간 전화 통화한다. 신규 고객에게 전화 통화로 서비스를 소개하고 설득해서 서비스도 판매한다. 코로나로 대면 미팅은 거의 없어져서, 한 번도 안 만나고 목소리만 아는 고객들도 꽤 많다.
동향 사람들을 대할 때는 사투리를 쓰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다. 공통점이 있는 사람에겐 경계심을 풀고, 신뢰감까지 갖는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호남 출신 고객분과 전화통화가 길어지면 나도 덩달아 같은 억양을 쓸 때도 많다. 그리고 가장 전화 통화를 많이 하는 고객은 당연히 서울 경기권 분들이다.
서울에서 12년 넘게 살지만, 29년을 울산에서 살았기에 서울말은 여전히 어색하다. 여자애들은 1년만에 서울 사람처럼 말하던데 참 부럽다. 영어나 일본어를 잘 하는 사람보다 더 부러울 정도다. 사투리를 교정해주는 스피치 학원까지 성업중인 이유일 것이다.
사투리를 고치고 싶었다. 아나운서에게 스피치 수업도 받고, 낭독 수업과 목소리 과정도 받았다. 아무리해도 안 되었다. 포기하고 집에서 사투리를 쓴 적이 있다. 아내의 격렬한 반대로 그마저도 실패했다. 아들에게 교육적으로도 안 좋고, 내 이미지와 너무너무 안 어울린단다. 내가 사투리 썼으면 절대로 결혼을 안 했을 거라는 무시무시한 말도 서슴지 않았다. 힘들게 연습했던 서울말이 내 운명을 바꾼 셈이다.
2년 전에 강의를 한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은 내 강의를 보고 너무너무 잠 온다고 혹평했다. 진지하게 asmr이나 명상 콘텐츠를 해보라는 조언을 해준 이도 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알았다.
나는 서울말을 한 것이 아니라, 사투리 억양을 숨기는데 급급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재미없는 말투가 되어버렸다. 어쩌다 그랬을까?
문제는 중국 유학이었다. 그 때부터 내 말이 심하게 어눌해졌다. 중국어를 너무 열심히 해서 한국말을 잊은 거라면 덜 억울하겠지만 그건 아니다. 거기서 내 말이 사투리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서울과 호남에서 온 학생들은 우리 울산대 친구들의 중국어 성조(악센트)를 놀려댔다.
"참 신기해. 경상도 애들은 중국어 할 때도 경상도 억양으로 해"
그렇다. 배운지 얼마 안 된 경우엔 자신의 모국어 억양이 많이 묻어나온다. 나도 중국어를 들으면 서울 사람인지 경상도 사람인지 정도는 구별할 수 있었다. 이 이야기를 룸메이트에게 했다. 그는 유명한 책 이야기를 했다.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라는 책에, 영어를 잘 하고 싶다면 사투리부터 고치라는 내용이 있단다. p와 f 그리고 b와 v 발음 구별을 가장 못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경상도 사람이고, 아무튼 영어를 잘 하려면 사투리부터 하지 말란 거다. 200만부가 넘게 팔린 그 책을 읽진 않았지만, 적어도 나에겐 <사투리 절대로 하지마라> 라는 책으로 남았다.
'나는 서울말을 할거야! 중국어도 영어도 잘 할거야' 이렇게 다짐하며 중국 기숙사에서 틈날 때마다 서울말을 연습했다. 그 때부터 어눌한 말투도 시작되었다. 서울에서 10년 넘게 살아서 잠꼬대도 서울말로 한다. 그러나 재미없고 지루한 말투는 고치고 싶었다. 부자가 되는 말투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어눌하게 말하고, 그래서 들으면 졸리는 말투는 고치고 싶었다. 더 열심히 낭독 연습도 했다.
그러다 <이재명 스피치>의 저자인 박사랑 대표님의 말씀이 2년만에 생각났다.
"아나운서 지망생들은 원래 말을 잘 하던 사람들이 많아요"
그렇다. 말하기는 타고나는 것도 크다. 어릴 때부터 가진 습관 자체를 고치는 교정의 영역이다.
'지금 혹시 재능 없는 것에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고 있는건 아닐까?'
이번에 마지막으로 도전해보고, 안 되면 다시는 연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비장한 마음으로 이지혜 코치님의 목소리 습관만들기 7주 과정을 재수강했다. 그리고 코칭 중에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영식이를 깨워주셨다.
예능 <나는 솔로> 10기 영식은 굉장히 특이한 캐릭터다. 자기애가 충만한 30대 상남자로 영업쪽 일을 한다. 고풍스럽고 뻔뻔한 사투리를 가끔 영어와 섞어쓴다.
"그대 뜻에 맡기겠소. 잇츠 업 투 유."
"우리가 돌싱이고 양육자지만 그대는 명확히 나의 여자고, 나는 그대의 명확한 남자야."
"정말 너 이상한 모습이야 너 에이스야. 누가 뭐 래도 너같이 매력적인 애가 이상한 순애보를 하고 있어"
마치 내 안에 잠든 영식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정말 나 이상한 모습이야. 고등학생 때, 전교생이 다 아는 핵인싸였고, 재밌는 억양으로 말하던 아이였는데, 서울말과 이상한 순애보를 하고 있어"
며칠 고민 끝에, 서울말 흉내는 완전히 멈추었다. 그리고 가끔 서울말이 필요할 때는 '조금 더 오버해서 연기하듯' 한다. 회사에서도 그 상황에 맞게 능동적으로 말하는 억양과 톤을 조절하고 있다.
이걸 '모드 체인지’라고 한다. 노래를 부를 때 그 노래에 맞게 연기를 하는 것과 같다. 아들에게는 굳이 억양이 강한 사투리를 안 쓰고, 재미있는 성우의 목소리로 연기를 하고, 아내에겐 부드러운 서울 억양을 쓰면 되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애매한 서울말’은 안 쓰게 된다.
내 업무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영업팀의 파는 일에는 애프터 서비스도 포함된다. 10월 중순 카카오톡 데이터서버에 화재가 있었다. 이틀 동안 카카오스토리 채널에 게시가 안 되었다. 예약한 날은 안 올라가더니 24시간 뒤에 게시되는 에러도 있었다. 내 문제도 아니지만, 매출이 곤두박질 난 고객들은 이미 화가 나있다. 특히 어눌한 서울말을 하며 달래주다보면 힘이 든다.
이젠 서울말 뒤에 숨지 않는다. 고객의 불편에 공감하는 마음을 담아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아이고 고객님, 카카오 서버에 불 나서 저희도 속에 천불이 납니더. 게시물도 잘 안 올라가고예. 저희가 해드릴 수 있는게 없어서예, 많이 힘드시지예? 정상화 되는대로 연락 드릴께예"
책 읽는 것도, 사장에게 업무 보고를 하는 것도 자연스러워졌다. 말하는 게 술술 풀리니 생각도 술술 풀린다. 마법 같은 한 달이었다. 지난 한 달동안 새로운 책도 5권이나 읽고, 프로그램 공부도 시작했다.
이 글을 읽는 구독자들에게 영식버전으로 인사를 남긴다.
원씽 브릿지를 읽어줘서 고마워
그대는 명확히 나의 에이스고, 구독은 나의 원씽이야.